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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 26 - 국제그룹 창업주 양정모(梁正模)

대한민국 신발왕 “수출은 나의 체면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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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뉴스
기사입력 2020-12-02

대한민국 경제성장 뿌리

섬유패션산업 큰 별을 찾아서

 

국제그룹 창업주 

양정모(梁正模)

1921~2009

 

▲국제그룹 창업주 양정모 © TIN뉴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신발업계의 제왕으로 군림해온 국제그룹은 양태진, 양정모 부자 2대가 동업자이자 창업자이다. 국제그룹의 시작은 당시 삼성이나 현대와 마찬가지로 쌀장사가 그 뿌리를 이룬다.

 

아버지 양태진(梁泰振)은 1901년생으로 11살 때 부친을 여의면서 모친을 따라 보따리 행상을 시작한다. 행상을 하며 모은 돈으로 쌀가게를 차렸는데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 전쟁특수로 큰돈을 벌면서 1940년 일본인 4명과 공동으로 정미소를 세운다.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정미소를 귀속 받게 되는데 당시 천석꾼에 버금가는 10만원이라는 거금도 얻게 돼 친구들과 함께 조선목재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장에 취임한다.

 

아들 양정모(梁正模)는 1921년 부산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공업학교를 졸업 후 부친의 정미소 일을 돕다가 식량영단 경남지부에 취직한다. 부업으로 광목, 신발, 설탕 같은 생필품을 사서 소매상에 되파는 일을 했는데 당시 월급의 300배 이상을 벌기도 한다.

 

장사의 맛을 알게 되면서 광복 직후 귀국하는 동포들과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환전 중개를 하며 큰 재미를 본다.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자신만의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신발공장과 신발도매상에 관심을 갖던 양정모는 1947년 부친의 정미소 북쪽 귀퉁이에 150평 정도의 목조건물을 마련하고 자신이 지은 ‘국제고무공업사’란 상호를 내걸고 본격적으로 고무신을 생산한다.

 

이때 작명가로부터 왕자(王者)라는 상표를 함께 쓰면 20년은 무난히 번창할 것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설립 1년 만에 부산진시장에서 이름을 알리면서 판로를 차츰 넓혀간다.

 

 부산 동구 범일동의 국제고무공업사 전경 © TIN뉴스

  

국제고무가 하루 6백 켤레 정도를 생산하던 당시 부산시내에만 신발공장이 71개로 다방(60개)보다 많았고 하루 3만 켤레 이상 생산업체는 14개나 되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양정모는 작업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제조 공정을 하나하나 직접 배웠다.

 

 국제그룹은 양태진<사진>, 양정모 부자 2대가 동업자이자 창업자이다 

1948년 정미소에 큰불이 나면서 아버지 양태진은 한동안 손댔던 목재사업도 청산한다.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던 중에 아들의 신발공장이 제법 기반을 잡아가고 화학공업의 전망도 밝다고 판단이 들어 과감히 전 재산을 투자하기로 결정한다.

 

1949년 12월 자본금 1천만원으로 ‘국제고무공업사’를 ‘국제화학주식회사’로 확대 발족시키고 장사 경험이 풍부한 양태진이 직접 사장을 맡았다. 이때 서류처리 같은 복잡한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작업현장을 지휘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 있었던 국제화학 신발 제조 작업장의 1965년 모습 © TIN뉴스

  

자본이 뒷받침이 되자 이들 부자는 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기능공 스카우트에 전력을 다한다. 전국을 수소문한 끝에 당시 경성고무 군산공장장인 박영진씨를 두 배의 월급에 3개월 시한부라는 조건으로 스카우트하는데 성공한다.

 

박씨는 평양 정창고무 배합기사 출신인데 황혼 때면 향수병이 발동해, 술집으로 직행했다. 그때마다 양정모도 매일 따라다니며 술벗을 해줬다. 그런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박씨는 흔한 검정색 고무신은 물론, 다갈색 황색고무신 등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낼 정도로 그 분야에서는 단연 군계일학과 같은 존재였다.

 

 '왕자표' 신발을 생산했던 국제고무의 신문광고와 전시행사장 전경 © TIN뉴스

  

당시 국제화학은 값싸고 좋은 제품을 위해 사장보다 월급을 더 많이 줄 정도로 기술자를 우대했는데 이때의 원칙은 훗날 국제그룹이 신발업계 정상으로 올라가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부산 이외의 신발공장이 모두 부서지면서 없어서 못 팔정도로 부산 신발의 인기가 높아졌다. 여기에 원료의 주종도 떨어져 못 신게 된 헌 고무신을 수거만 해오면 저절로 확보됐다. 전쟁 전만 해도 경성고무, 천일고무 등이 시장을 석권했으나 전쟁 이후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이때 신발업계가 군수공장으로 지정되면서 호황을 누리게 되자 국제화학도 자본금을 10배 이상 증자해 시설확장에 나선다. 하지만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업체 간 과당경쟁으로 심각한 불황기에 접어들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그해 9월 담뱃불로 화재가 발생, 공장건물과 기계시설 대부분이 소실된다.

 

신발공장의 경우 원료들이 불에 취약해 화재가 잦았는데 1960년 견습여공 한사람이 무심결에 그어댄 성냥 한 개비로 벌어진 공장 화재 때는 66명의 여공들이 숨졌으며, 부상자 50명, 재산손실 2억원이라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국제화학 신발공장에서 운동화를 생산하는 모습. 부산박물관 제공 © TIN뉴스

  

그 뒤에도 65년, 68년, 74년 등 큰불만 손꼽아 봐도 5~6회가 넘을 정도로 국제화학은 유독 큰 화재를 많이 겪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큰 불이 났을 때마다 사업이 더 번창해서 국제그룹을 훗날 ‘불재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특히 1960년 화재는 그해 세계 10대 화재 중의 하나로 선정될 정도의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다. 다행히 모아놓은 돈이 많아 다시 재기에 성공 1962년 주문자 생산 방식으로 농구화를 국내 최초로 일본에 수출했다. 

 

곧바로 대폭 증자에 나서 1963년 미식 농구화의 대량수출에 대비한 진양화학을 설립한다. 진양화학은 양정모가 직접 설계와 최신기계를 설치하며 심혈을 기울인 분신으로 본사인 국제화학보다 고정자산이 3배 이상으로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다.

 

 2008년 KPX 신규 CI 선포식에 참석한 양규모 KPX홀딩스 회장<사진 우측> © TIN뉴스

 

하지만 아버지 양태진은 진양화학을 양정모의 이복동생인 양규모에게 주기로 결정한다. 이에 양정모는 자신에게는 보잘 것 없는 구식공장만 남겨준다는 불평과 함께 서운함 감정을 내비쳤지만 “너는 어디 가서 무엇을 해도 성공할 수 있다”며 달래는 아버지의 뜻을 꺽지는 못한다.

 

1968년 약 5개월간의 진통 속에 국제와 진양이 분리되면서 양태진은 회장으로 승격해 진양화학 경영에 전념했고, 국제화학은 그때부터 아들 양정모의 시대로 들어선다.

 

진양(進洋)은 바다건너 해외로 수출을 전담하는 회사로 키우기 위해 양태진이 명명한 것인데 두 회사를 분리할 때 국제는 내수를, 진양은 수출을 주로 맡기를 원했지만 후에는 오히려 국제가 신발류 수출을 석권하게 된다.

 

여러 차례의 대형화재와 뼈아픈 재산분할의 진통을 겪었지만 양정모는 사장에 취임하자마자 진양화학을 능가하는 새로운 공장을 짓는데 사활을 건다.

 

▲ 1992년 경남 김해시로 이전하기 직전의 국제상사 사상공장 전경  © TIN뉴스

  

사상공단에 있는 신라고무공업사의 부지 6만9천평을 매입, 대규모 공장건설에 착수하고 일본에서 최신 기계도 도입했다. 하지만 1969년 수출 실적이 전년도의 절반에 그치자 국제화학에 대한 온갖 악의적 루머가 시중에 나돌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자 양정모는 “오늘의 문제가 자금이라면 내일의 문제는 기술이요. 신제품 개발이다. 오늘의 자금문제는 무슨 수를 쓰던 내가 책임을 진다. 여러분들은 내일을 위해 기술과 신제품 개발에 매진해 달라!”며 임직원들을 독려했다.

 

힘을 얻은 직원들의 의기투합으로 다음해 수출 신장이 4배나 증가했는데 ‘보증수표’란 별명답게 양정모에 대한 직원들의 믿음이 여실히 증명됐다. 사상공장 건설 효과는 해를 거듭할수록 두드러지게 나타나 1972년 국제화학의 신발 생산량은 전국의 20%를 차지하게 된다.

 

서울 진출의 발판이자 국제무대로의 시발점이 된 사상공장을 지을 때 수억 원의 사채 때문에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다행히 선진국에서 신발공장이 공해산업으로 사양길을 걷자 정부에서 수출드라이브정책으로 신발 수출을 적극 지원, 양정모에게 돌파구를 마련해줬다. 

 

특히 1972년 당시 자본금 5억5천만원 중 사채가 4억3천만원에 달했는데 정부의 8.3사채동결조치로 누구보다 큰 혜택을 입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혜택은 훗날 국제그룹이 무리한 확장으로 발생한 위기에 안일하게 대처하는 단초가 됐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 1978년 11월 4억불 수출탑을 수상하고 있는 양정모 회장  © TIN뉴스

  

신발 수출 붐을 타고 국제그룹은 급격하게 성장했다. 1974년 5천만불을 돌파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수출유공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5년 1억불 돌파를 시작으로 1979년에는 5억불까지 수출액이 급신장했다.

 

양정모는 평소 “수출은 나의 체면과 같다”고 강조해왔다. 수출을 늘려 고용을 확대하고 외환수지를 호전시키는 것이 기업의 큰 임무 중의 하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제화학은 성장가도를 질주하면서 70년대 들어 신발제조와 관련된 성창섬유, 국제방직, 국제상선, 풍국화학, 조광무역 등 계열업체를 거느리며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동해투자금융을 설립하고 동아금속, 보국증권, 삼양펄프 등을 인수하며 20여개의 계열사를 지닌 명실공이 재벌그룹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국제화학은 1970년대에 현장 종업원만 3만 명이 넘는 세계최대 신발회사로 등극하면서 금융, 건설, 화학 분야로 속속 진출한 데 이어 전국 4번 째 종합상사로 지정되는 등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 TIN뉴스

  

이러한 과정에서 1975년 국제화학은 국내에서 네번째로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돼 이듬해 상호를 국제상사로 바꾸고 절정기를 맞는다. 같은 해 시어즈 로벅으로부터 우수납품업체에게 수여하는 ‘EPA상’을 국내 최초로 수상한다.

 

 국제상사가 1977년 근로자야간특별학급운영에 대한 공으로 대통령단체 표창을 수여받고 있다. © TIN뉴스

  

창업 30주년을 맞은 1977년에는 연합철강과 그 계열사인 연합물산, 연합개발, 연합통운을 인수했다. 그해 무역진흥확대회의에서는 근로자야간특별학급운영에 대한 공으로 대통령단체 표창을 수여받는다. 특별학급은 근로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새마을운동으로 추진한 것으로 국제상사는 구포여상을 지정하여 여직공 가운데서 신입생을 선발했다.

 

▲ 1982년 서울국제무역박람회에 설치된 국제그룹 전시관의 모습  © TIN뉴스

  

80년대로 접어든 국제는 철강, 방적, 섬유, 기계, 타이어, 전자, 제지, 해운, 육운, 건설, 관광, 금융 그리고 플랜트까지 아우르는 종합그룹으로 우뚝 서게 된다. 실제 국제의 전성기인 75년~83년 사이 매출액만 28배가 늘어나지만 기업규모에 비해 부채 또한 과도했던 게 사실이다.

 

국제상사는 외국 바이어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자체 개발 능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해 1982년 프로스펙스란 독자 브랜드를 개발한다. 국내시장에서는 나름 성공을 거두었지만 미국시장에서는 3천만불의 큰 손실만 보고 실패한다.

 

 600억원을 투입하여 신축한 국제그룹 서울 용산사옥(현 LS용산타워)  © TIN뉴스

  

또한 600억원을 투입하여 신축한 서울 용산사옥의 임대가 여의치 않으면서 심각한 자금난을 겪기도 한다. 결국 경험 없이 뛰어든 건설사업도 자금난을 심화시키는 데 단단히 한몫을 한다.

 

여기에다 증권사에 채권을 매도해 1천억원 가까운 자금을 조달했는데 1984년 정부가 국제그룹에 대한 환매채 지원을 중단해 제일은행이 어음 78매 432억원을 부도 처리시키면서 1차 부도사태를 맞는다.

 

85년 2월 총선을 앞두고 1천300억원의 대출이 이뤄지며 고비를 넘기는 듯했지만 선거가 끝난 후 제일은행이 국제상사 해체를 발표하면서 신발 부문은 한일합섬, 건설 부문은 극동건설,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에 넘어간다.

 

결국 84년까지만 해도 연간 매출액 2조원, 수출액 9억불에 달하는 21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국내 굴지의 재벌기업으로 재계 7위까지 올랐던 국제상사는 1985년 그룹 해체라는 비운을 맞게 된다. 10여 년간의 급속한 외형팽창이 재무구조의 악화를 불렀고 이것이 해체의 명분을 제공한 측면이 강하다.

 

한편, 표면적인 이유 외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국제그룹의 경우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일반적인 성장과는 달리 정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부를 축적한 보기 드문 기업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앙 무대의 시류에 둔감하고 로비 능력이나 교제술이 떨어졌다고 한다.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왼쪽부터)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선서하는 모습. 정주영 회장은 국제그룹 해체 3년 뒤 열린 세미나에서 국제그룹처럼 기업인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일군 기업군을 일거에 분해시켜버린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 TIN뉴스

  

평소 허튼 곳에 돈을 쓰지 않았던 양정모도 “그 돈이면 고무신이 몇 켤레인데”라며 정치자금을 내는데 매우 비협조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래서 새마을성금이나 평화의 댐, 일해재단 모금 과정에서 그룹 규모에 비해 너무 적은 액수를 내 당시 막강한 5공 정치권력의 괘씸죄에 걸려든 것이라는 설도 있다.

 

1987년 정권교체 가능성이 거의 확실시되자 양정모는 국제그룹 복원본부를 설립하여 회사 되찾기 운동을 펼쳤다. 1993년 헌법재판소가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란 판결을 내리면서 한일그룹을 상대로 국제상사 소유권반환 청구소송을 제기했지만 1996년 대법원 최종판결에선 패소하고 말았다. 이후 정·관계 로비 사건과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그룹 재건의 꿈은 이루지 못하게 된다.

 

국제상사는 1998년 한일그룹의 부도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 1999년 법정 관리를 받았으며, 2002년 이랜드에 인수됐다. 이후 2006년 E1에 매각되었고, 다시 2007년 LS그룹 계열사로 편입돼 2008년에 LS네트웍스로 사명을 변경했다.

 

 비운의 경영인으로 불리는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은 2009년 3월 29일 향년 88세로 별세했다. © TIN뉴스

  

국제그룹으로 부산 지역경제사에 큰 족적을 남긴 아버지 양태진은 1976년 76세로, 아들 양정모는 2009년 79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김상현 기자 tinnews@ti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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